Sawano Hiroyuki, Eye-Water
불길하다. 그 애를 본 사람들은 곧잘 말하곤 했다. 얼굴에 도화가 다분해서 패가망신을 주도할 거라고, 하물며 사내아이에게 끼었으니 얼마나 흉한 꼴을 초래할 것이냐, 하고. 우리 마을의 망신이라고 불리던 그 애는 거짓말처럼 연일 혼자였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붉은 눈가는 때때로 쓸쓸해 보였는데, 그 애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화끈거리는 감각이 일어서, 그것이 독獨의 색色일까 싶은 생각에 잠을 뒤척이던 날도 잦았다. 시선의 뒤꽁무니가 내 얼굴에 머무를 때면 화상을 입은 것만 같았다. 알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예정된 일처럼 홀렸던 것 같다. 연심이었다.
개화開花
Jr. X JB
뽐른 전력 94 분
겨울이 올 때면 북두칠성이 선명해지던 이곳은 외진 촌이었다. 또렷하게 퍼지는 입김을 구경하다가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 봐도 절경이었다. 한 세기를 건넌 것도 아닌데 시멘트 냄새보다 기와가, 세련된 단색보다는 황토색이 눈에 익숙한 동네. 촌가가 무수한 마을답게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중심축이었고, 양반집 자손에 장남이었던 나는 그럴듯한 대접을 받곤 했다. 명절이 다가오거나 한 가정에 축하할 만한 일이 생길 때면 두루두루 모여서 음식이나 말 따위를 나누기도 했다. 대부분 가족처럼 친밀하게 지냈는데,
임재범. 홀로 겉돌던 그 애는 무당인 어머니와 둘이서 사는 편모 가정이었다. 아주머니가 잡귀를 쫓는 날이면 새벽녘부터 뛰쳐나와 우리 집 앞에 있는 하천 근처에 쪼그려 앉아서 투명한 물에 손을 담거나 돌을 던지곤 했다. 햇빛이 강한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매일 나무 뒤에 숨어서 훔쳐봤지만 인사를 건넬 용기조차 없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정말 나무처럼.
왜 혼자일까. 일차적 의문과 왕성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 가까이 있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긴대. 왜? 그런 게 있어. 진영이는 아빠 말 잘 들을 수 있지. 이상하잖아요. 그래, 이상했다. 논리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멀리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납득할 수가 없어서, 항상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지내는 그 애를 가만 둘 수가 없어서, 그때부터 가까워지고 싶다는 열망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며칠간 방법을 모색하다가 떠올린 건 책이었다. 학문이나 가정 교육에 엄한 우리 집에서 숙제처럼 일주일에 몇 권씩 필수로 읽어야 하는 책. 그래서 하루는 하굣길에 쪽지를 적어서 그 애의 손에 쥐여 줬다.
“뭔데.”
“시.”
“왜 나한테 줘?”
“너한테 주고 싶었으니까.”
워낙 어렸을 적이라서 그런지 남자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 말만 남긴 채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을까. 나를 보고 있기는 할까. 쪽지는 읽어 줄까.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그 나이에는 보편적인 우정이라고 착각했었다.
[밤의 바다란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일까
저렇게까지 아름다운 것은 원래 저렇게 불길한 것일까 생각했는데
황인찬]
그 애가 아름다운 건 죄가 아니었으니까.
다음 날, 그 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천 근처에도 오지 않았고, 심지어 학교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고 하루 종일 그 애만 쳐다보고 있어도 뒤통수에 아무런 감각이 없는 건지 시큰둥한 얼굴로 칠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에서의 그 애도 혼자였는데, 아이들은 도화桃花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괴롭힐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뒤에서 소곤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개중에는 귀신이 붙었다고 떠드는 애도 있었다. 혹시 버린 거냐고 묻고 싶어서 다가갈 때면 그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고 휙 가 버렸다. 화난 거겠지. 잔뜩 풀이 죽어서 이튿날 점심부터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3 일째 되는 날을 맞이했다.
“야.”
“어?”
“이거. 그리고 나한테 말 걸지 마라.”
그 애는 방과 후에 둘만 남은 교실에서 다른 공책에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를 나에게 던지며 말했다. 색깔이 다르네. 새로 쓴 건가. 답장인 것 같은데, 왜 말을 걸지 말라고 하는 거지. 불쾌했던 건가. 마인드맵처럼 퍼지는 생각을 잠시 접어 두고 침을 삼키며 쪽지를 열었다.
[네 하얀 마음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나태주]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일 년이 지나고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 한 학년에 스무 명, 전교생이 끽해야 70 명 안팎인 그 중학교는 걸어서 10 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바로 뒤이기도 해서 중학생이 된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 거주하는 또래는 전부 거치는 통과 의례 같은 장소였다.
그 이후로 그 애와 쪽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나는 빠르면 하루, 늦어도 일주일 내로 썼지만 그 애는 일주일에서 한 달 간격으로 건네주곤 했다.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나랑 친해지고 싶지 않은 건지, 마지못해 어울려 주는 건 아닐지 하는 노파심에 가슴을 졸였던 것뿐이었다. 집에서 따로 하는 일이 있겠지라는 생각까지 도달했을 때는 괜한 불안감도 엄습했다. 혹시라도 안 좋은 길을 걷게 된다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사건은 중학교 2 학년에 진학한 무렵 터졌다. 그 날도 평소처럼 무당인 아주머니가 굿을 봐야 했고, 그 애는 화창한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나와서 하천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부지런하게 7 시부터 기상한 나는 환기 겸 창문을 열었다가 그 애의 작은 점 같은 뒤통수를 발견했다. 밥은 먹었을까. 말을 걸어도 될까. 던지는 돌은 어떤 모양이고, 고르는 기준은 뭘까. 아무거나 던지는 건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품고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점심을 먹자고 채근하는 어머니의 말에 급하게 끼니를 해치운 뒤, 방에 있는 과자 한두 개를 집어서 쿵쿵거리며 뛰었다. 친구랑 놀다가 올게요. 나에게는 내정된 사실이었지만, 과연 그 애도 나를 친구라고 생각할까.
아저씨랑 가자, 응? 혹시라도 넘어질까 돌계단을 내려다보며 걷는 와중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좋은 색싯감이 없어서 장가갈 생각이 없다며 주선을 거절하던 성격 좋은 홀아비가 있었다. 아저씨는 그 애의 조그마한 손을 잡고 구걸하듯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다 보내 줄게. 이상한 짓도 안 할게. 대신 아저씨가 외로울 때 만지기만 할게. 이렇게 말랐잖아, 재범아. 너희 엄마도 너한테 관심 없고. 어? 같이 가자.
더럽다. 난생 처음 타인에게 악의라는 걸 품어 봤다.
재범아, 기다렸어? 내가 뛰어가자 아저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바로 떼었다. 아, 진영아,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아저씨에게 무슨 용건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굶은 것 같길래 뭐라도 먹이고 싶어서…….’ 하고 얼버무렸다. 이런 쪽의 연기는 영 별로네. 그 애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물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속도 없는 새끼.
오늘 점심은 저랑 먹기로 했어요. 재범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김씨 아저씨. 부모님께 꼭 말씀 드릴게요. 좋은 여자 많이 생길 거예요. 얼른 결혼하셨으면 좋겠네요. 눈이 접혀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 게 느껴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더니 괜찮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당연히 안 되겠지. 속으로 이를 바득 갈며 들어가 보세요, 했더니 그 애를 힐끔 쳐다보곤 허겁지겁 뛰어간다. 녹음해 두고 신고할걸.
“너는 말을 못 해?”
“뭐가.”
“싫다는 거절의 의사는 똑바로 표현해야 될 거 아니야. 왜 가만히 있어.”
“딱히 상관없는데.”
“뭐?”
“누가 주워 가도 상관없다고.”
말문이 막혀서 허, 하고 한숨 섞인 탄성을 뱉었더니 그 애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쳐다본다. 마음이 충치처럼 썩어 가는 것 같다. 나보다 살짝 큰 그 애를 원망 담긴 눈으로 올려다봤더니 눈을 맞춰 왔다. 불쾌감이 가시질 않아서, 그 아저씨가 잡았던 그 애의 차가운 손목을 잡고 미끄러지듯 천천히 손을 내렸다. 물에 손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덩치에 비해 짧은 손가락이 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내가 싫어.”
처음으로 그 애의 표정을 봤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란 건지 옆으로 찢어진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순간 접혔다.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웃는 얼굴이 눈부셨다. 예쁘다. 너는 알고 있을까. 둥근 눈썹도, 긴 속눈썹도, 웃을 때 접히는 눈도, 눈 위에 있는 두 개의 점도, 깔끔하게 각을 이루는 코도, 붉은 볼도, 입매도.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버거운 감정 탓에 행동으로 옮길 정신도 없었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게 느껴졌다.
“왜 울어.”
그 애는 잡고 있는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다정하게 물어 왔다. 하얗다.
내가 옆에 앉아 우는 내내 그 애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작은 손가락이 사랑스러웠다. 원래 말이 없는 걸까 싶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줘서 고마웠던 것 같다. 가슴 언저리에서 간질거리던 느낌은 마치 과학 시간에 잉크를 스포이트로 물에 풀었을 때처럼 서서히 번져 나가고 있었다. 가끔은 사무치게 시렵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말할 수가 없어서, 침묵을 지키는 것만이 우리라는 관계의 형성일 것 같아서 가만히 돌을 던지는 그 애를 지켜보기만 했다. 예쁜데, 이렇게 예쁜데. 미美가 무조건적으로 동반하는 건 불길함이라는 걸까.
“이거. 오늘 주려고 했는데, 너희 집에 부모님 계시길래.”
재범이가 이제 필요 없겠다, 하는 말과 함께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구겼다. 그 애의 마음이 구겨지는 것 같아서, 괜찮다고 말하면서 구겨진 종이를 잡아채자 수줍어하며 진짜 필요 없을 텐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애에 관한 것들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이제 갈게. 그 애는 하나의 풍경화처럼 석양과 뒤섞이며 걸어갔다. 엄지손가락만하게, 점보다 작게, 그리고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모습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설레는 마음을 꾹 누르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도 하지 않고 쪽지를 열었다.
[오늘은 너를 빌려 가고 싶어. 가지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김선우]
그리고 그 날, 처음으로 몽정을 했다.
그 애는 도화살이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마을 회관에서 재범이랑 같은 고등학교더라구요, 하니 어른들이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입을 떼었다. 옛날의 사전적 정의는 음란하고 성욕이 강하며, 본인도 모르게 사람을 홀리고 다니는 불길한 사주라고 했다. 정숙하고 얌전한 사람도 무의식적으로 사로잡게 되는, 남자를 시름시름 앓게 만드는 그런 거. 내가 앓는 건 전부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수긍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질투가 슬슬 끓던 참이었다. 그 애에게 욕정을 품은 건 그 아저씨뿐만이 아니겠지. 나는 그 애의 친구로 그칠 수 있을까.
그 학교에 진학한 같은 중학교 출신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워낙 학생 수가 적어서 당연한 일이겠지만서도, 그 애의 성적이 생각보다 좋았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입학식 날 탔던 버스에서, 그리고 정문 앞에서까지 보게 되니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너 여기 다녀? 하고 묻고 말았다. 그 애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끔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친 뒤 타는 버스에서 그 애를 보곤 했는데, 자리가 있어도 매일 서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며칠 뒤부터는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 둔 뒤 그 애가 타면 나에게 얼굴을 돌릴 때까지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옆으로 고갯짓을 하니까 어색한 걸음걸이로 옆에 앉았다. 그 애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우리 사이에 독이 될 것 같아서 매번 참았다.
그 애는 버스에서 항상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었는데, 한 번은 궁금해서 휴대 전화 화면을 보니 새까만 액정에 버스 구석만 비칠 뿐이었다. 작게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어 보니 가사는 없었던 것 같다. 언어가 소실된 것이 그 애랑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올 때면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꾸벅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루는 반대쪽 어깨를 살짝 당겨서 나에게 기대게 했더니 놀라서 깬 건지 눈을 끔뻑거리다가 괜찮아, 하고 입모양으로 말하는 나를 보고 눈을 접어 웃으며 다시 감았다. 몸이 떨리거나 심박수가 높아져서 깨면 어떡하지. 시끄럽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새하얀 팔목을 바라보곤 했다. 그게 내 일상의 전부였다.
한 번은 종점이 우리 동네인지라 버스에 둘만 남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옆에서 졸고 있는 그 애의 입술에 입을 맞춰 본 적도 있었다. 입술이 텄네. 립밤을 사 줘야 하나. 그 애는 자느라 정신이 없는 건지 속눈썹만 파르르 떨고 말았다. 죄책감도 들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심장이 뛰는 바람에 창밖에 비친 얼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귀가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첫키스였다. 그 애에게 바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부서질 것 같은 어깨를 더 세게 감싸 안았다.
며칠 전부터 그 애가 하굣길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학업이나 동아리 활동에 치이느라 책을 읽지 못했고, 그 애와 버스에서 매일 만나기 때문인지 쪽지에 대한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안일한 상태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바쁘겠지, 무슨 일이 있겠지, 하며 신경 쓰지 않으려고 발악했지만 불면까지 앓게 될 수준이 되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나의 신경은 전부 그 애에게 쏠려 있었다.
“그, 너희 반 임재범 있잖아. 혹시 어디 있는지 아니.”
결국 방과 후에 그 애의 반까지 찾아가서 눈에 보이는 애를 잡고 물어봤다. 안경을 쓴 작은 남자애는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교실 문을 잡고 고민하다가 이내 아, 반찬, 하고 대답했다. 반찬?
“몇 남자애들이 반찬이라고 부르잖아, 꼴리게 생겼다고.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다. 걔, 댄스 동아리 들어갔어. 질 나쁜 애들이랑 어울리니까 참고해.”
그 애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았다.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열이 목덜미와 귀 부근까지 올라오고, 경련을 일으키듯 손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몇 명의 남자애들이 재범이를 지저분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조롱거리가 된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과 어울릴 거라는 것도.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걔네랑 키스는 했을까. 합의하에 한 걸까. 섹스도 했을까. 나쁜 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버스에서 그 애에 관한 온갖 상상을 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그 애가 상기될 때마다 비집고 오는 설움을 눌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불을 껴안고 내내 울다가 잠에 들었다. 아팠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그 애랑 버스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정류장에 보이기라도 하면 일부러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고, 교내나 운동장에서 피어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꼴로 질 나쁜 아이들 사이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얼굴을 구긴 채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2 학년이 지나면 동아리 활동이 더 활발해지니까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겠지. 자기 위로는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세상을 뒤로 한 채 공부에만 전념했다. 목표는 무조건 4년제 서울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신경 쓸 것들이 사라졌다는 자기 합리화를 내리기도 했고, 역시 그런 걸 좋아하는 애였구나, 하고 멋대로 재단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속이 아려 오기만 했다. 틈이 생길 때마다 울고 싶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몸이 도저히 버티질 못했다.
[너의 표정은 차갑고
너의 음성은 싸늘하지만
너를 볼 때마다 화상을 입는다
박건호]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쪽지를 그 애의 사물함에 넣어 뒀다. 앞면에 답장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라는 진심 아닌 진심을 적어 둔 채.
아무런 접점도 없이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1지망으로 적었던 대학에 합격했고, 부모님은 기뻐하시며 자취방도 알아봐 주셨다. 모든 건 막힘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 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애의 전화번호도 모르는 채, 고백도 못 한 채 보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쉬운 감정이 아니었는데, 나는. 단순히 억울했던 건지, 지워지지 않는 미련에 아직도 앓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졸업식 날, 그 애에게 자취방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줬다. 그 애는 내가 이름을 부를 때부터 당황한 티를 내더니 쪽지를 열어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답장하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주제에 이런 식으로 매달리니까 우습겠지. 그치만 아직도 밤마다 저린데 어떡해. 수도 없이 나를 자책해도 결과는 같았다.
“고마워.”
“어?”
“이거, 알려 줘서 고맙다고.”
가방 앞주머니에 조심스레 쪽지를 넣던 그 애가 다시 입을 떼기 시작했다.
“나, 동아리에서 만난 애들이랑 죽어라 춤만 췄어. 첫키스도 너였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상한 소문 도는 것 같은데, 혹시라도 어릴 적에 듣던 말 때문에 네가 믿을까 봐. 뭐, 상관은 없지만.”
그 애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친구들에게 가 버렸지만 나는 그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애의 목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날 밤 몰래 키스를 했던 것도, 소문을 믿고 있었던 것도, 일부러 피했다는 것도 다 알면서 가만히 있었던 건가. 불순하지 않던 그 애를 의심하고, 엄한 상상까지 해 가면서 내 안에서 더럽혔다는 사실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가만히 있었어. 왜 아무런 말도 안 했어. 왜 이제서야 말해. 끊임없는 질문이 터졌지만 대상이 없었기에 혼잣말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 같다, 나.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눈물이 차올랐다.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강당 뒤에서 고개만 숙인 채 천천히 젖어 가는 시멘트 바닥만 보고 있었다.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다.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그 애를 보지 못했다. 일 년간 얼굴은 물론, 편지도 오지 않았다. 차가운 쇳덩이에 손을 넣어 봐도 잡히는 건 전기세나 요금 통지서 같은 자잘한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새해를 맞이하자마자 자학을 일삼으며 술을 마시기도 했고, 밤마다 그 애 생각에 베개를 적시며 잠들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감정에 지고 사는 성격은 아닌 건지 대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빈도가 줄었다. 정확하게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빴다. 강의나 과제에 치여 그 애를 아예 떠올리지 못한 날도 있었다. 여름 즈음엔 키가 작고 귀여운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기도 했다. 항상 공부보다 뒷전이라는 이유로 몇 달도 안 가서 차였지만. 그래도 재범이에게 받았던 쪽지들은 닳기라도 할까 곱게 상자 속에 접어 넣은 상태였다. 여전히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2 학년이 되어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편지가 도착했다. 그 애였다.
손바닥만한 편지를 들고 침대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고민했다. 청첩장이면 어쩌지. 유서라거나, 원망 섞인 글이 적혀 있으면 어떡하지. 새해 인사가 프린트된 평범한 편지면 마음이 부서질 것 같은데. 그런 숱한 고민에 열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어떤 내용이든 나를 생각해 줬다는 의미이고, 결혼이라면 축의금이라도 내고 오자, 유서라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자, 나도 죽어 버릴까, 같은 결론을 내며 편지를 뜯었다.
[결빙을 풀고
나 너를 안을게
김이듬]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그 구절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깊숙한 곳에 숨겨 뒀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다가, 이내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감돌기 시작했다. 그 애가 가진 의미는 나에게 커다랗다 못해 버거웠으니까. 편지 봉투를 살펴보니 주소지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걸까. 어쩌면 구조 신호일지도 몰라. 거두절미하고 당장 만나고 싶다. 그 애의 하얀 얼굴이나 새까만 두 개의 점, 가느다란 팔목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지체할 시간은 더 이상 없었다. 밤늦게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란 걸 알지만 지금 보지 못한다면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만 같았다. 일생을 걸고 지켜 주고 싶던 그 애에게 남긴 상처에 딱지가 앉지는 않았을까, 흉터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지만 어루만져 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기에. 축축해지는 눈을 세게 비비며 겉옷을 챙겼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모든 감각이 일렁거렸다.